도입: 앙코르 유적을 소개하며..

(앙코르 <장엄한 성벽도시> / 시공사)에서 발췌

 

1. Why Angkor?
왜 앙코르인가? 19세기 말 산업혁명이후 서구중심으로 시작된 일명 ‘발견의 시대’에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은 그야말로 놀라운 발견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 로마 건축 양식만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서구 사람들의 시각에 앙코르 유적은 서구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들과 견주어도 전혀 꿀리지 않았고, 그런 고도의 문명을 가졌던 나라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제는 야만의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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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 프롬 돌무더기

 

“이들 앙코르 사원 중의 하나-솔로몬의 성전이나 미켈란젤로의 건축물에 필적하는-는 서구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들 사이에 갖다 놓아도 당당히 한 자리를 할 것이다. 이 사원은 그리스나 로마 문명이 우리에게 남겨 놓은 그 어떤 건축물보다 장엄하다. 그런데 이런 문명을 개화시켰던 나라가 지금은 야만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어떤 비애감마저 느껴진다.” / 앙리 무오

즉 장엄함과 비애가 동시에 느껴지는 것이 매력포인트였던 것 같다. 1850년 캄보디아에 방문한 프랑스 신부 샤를 에밀 부유보는 이렇게 또 말했다.

“한때는 장엄과 영광으로 빛나던 위대한 유적이 밀림 속에 버려져 황폐해진 광경을 보는 일처럼, 여행객에게 피로와 우울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으리.”

 

 

 

2. 발견? 서구중심의 재발견

흔히 앙코르 유적은 1858년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앙코르 왕조가 타이에 의해 무너진 이후 거대한 왕국은 버려지고 밀림속에 파묻혀 잊혀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앙코르 유적은 단 한 번도 잊혀진 적이 없었다. 내부적으로 캄보디아인들이 폐허가 된 사원에 드나들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13세기 원나라 사신 주달관이 방문했었고(진랍풍토기), 16세기에 카푸친 수도사가 다녀갔다. 17세기 초에는 일본의 상인들이 캄보디아와 타이에 진출했다. 1850년에는 앙리 무오보다 8년 먼저 프랑스 신부 부유보가 방문했었다. 물론 앙리 무오의 탐사 이후 국가적인 지원을 받아 탐사가 이루어졌고 서구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측면이 있지만, 발견이라는 표현은 서구 중심의 사고이며, 재발견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3. 다시 떠오르는 과거의 영광

앙리 무오 이후 개인적 차원의 임시 탐험시대는 마치고, 프랑스 극동학교는 고고학자들을 동원하여 60년간 앙코르의 옛 영광을 복원시키는 노력을 했다. 극동학교는 유적 진입로와 숙박시설의 개선을 제안했다. 1920년대 초가 되자 앙코르는 관광회사의 주요 관광상품으로 주목을 받았고, 그 와중에 프랑스의 문화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한 유명한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앙코르 유적중에 하나인 반테이 스레이의 데바타(여신상)을 도굴, 밀반출하다가 걸리기도 했다.

마르세유 식민지 전시회(1922)에서는 실물 크기의 앙코르왓 유적 모형을 제작하여 전시하고, 이후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은 대중에게도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까지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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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코르왓 일출